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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선인 박열朴烈과 일본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이준익의 영화로 다시 깨어나다_이제훈,최희서 주연 한국영화 박열

by 마음heart 2021.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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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박열朴烈,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일지라도 끝 모를 일제의 암흑 시기를 살다 간 우리에게는 독립투사요, 일본에게는 불량 선인이었던 분 되시겠다. 그렇게 잊혔던 박열이 이준익 감독의 연출로 다시 우리에게 찾아왔는데 왕의 남자, 사도, 동주 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과 싱크로율 100%를 자랑하는 이제훈이 박열 역으로, 최희서가 박열의 동반자 후미코 역에 최영환 역 백수장 그 외에도 권율 및 김인우. 배제기 등이 출연합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지워졌던 박열 그리고 후미코의 인연과 사랑은 그야말로 영화보다 영화 같은 스토리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영화 박열의 주요 시놉시스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천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되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해진 일본 내각은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합니다. 박열은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역사적인 재판을 시작하게 됩니다. 박열은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의 항일 사상 단체를 이끌어 온 박열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와중에 일본 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는데 이른바 대역 사건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秋田) 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의 옥살이를 치러야 했습니다. 해방 후 맥아더 정부에 의해 석방된 박열은 신조선 건설 동맹에 이어 재일본 조선인 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을 맡았으며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고 말았는데 북한에서 그는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아 군대 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에 노력하였으며 1974년 1월 17일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합니다. 현재 박열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습니다. 항일투쟁과 긴 조국 건설에 끼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이데올로기 대립과 박열이 신봉한 아나키즘 사상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박열은 남한과 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모두를 거부하고자 했던 그의 자유정신에서 찾을 수 있기도 합니다.

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나는 조선의 개새끼로소이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박열이 청년 조선이라는 잡지에 쓴 이 시는 양반의 오줌을 맞으면서도 그 양반의 바지에 오줌을 누는 개의 모습에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박열 자신의 모습과 아나키스트의 의지를 투영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카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이 시를 보고 직감적으로 박열이 자신의 정신적 동반자임을 알아봤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박열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기 전 일제의 압력으로 거짓 교육을 했다는 조선인 교사의 고백을 듣고 큰 충격 속에 빠져 평생을 민족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후 3.1 운동 때 독립투사들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에 박열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힘들다 여기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도쿄에서 활동하던 박열은 온건한 노선으로는 독립이 요원하다는 생각에 일본 내 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일본에서 친일을 하던 인사들에게 떠나라는 협박편지를 보내는 등 반일 활동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아나키스트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조선 청년이란 잡지에 1922년 게재한 개새끼란 시가 이때 기고한 것이며 당시 이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을 만나 서로의 사상에 공감하게 되고 국적이 다름에도 항일운동을 함께 하며 결국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박열을 처음 사랑하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박열의 식민지 조선 독립운동에 
휘말릴지 모른다고
아무리 독립운동이 나의 사상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박는 박열을 사랑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
나는 박열을 사랑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 나섰다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우리를 비웃어달라고.
다음 재판관들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모든 것은 권력이 만들어낸 허위이고 가식이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나는 박열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네코 후미코-

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가네코 후미코는 일왕을 폭살하려 한 혐의로 박열과 함께 구속되어 재판을 받으며 박열이 지은 "개새끼"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내가 하고 싶었던 그 일이 그 사람 안에 있었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숙명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고 법정에 선 것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박열의 사상에 생각에 동조되어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사형선고가 눈앞에 있는 순간에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유롭게 함께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사랑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사형선고 전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여 삶과 죽음까지도 영원히 함께 하기로 했지만 일제는 두 사람을 다른 교도소에 따로 수감, 이별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둘의 항일 의지를 꺾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향시키려고 편지와 독서, 글쓰기를 금지시키기도 했습니다. 재판장에서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늘 당당했습니다. 재판장에게 죄인 취급하지 말 것, 동등한 좌석 배치,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 사용 등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사모관대를 입고 가네코는 한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재판장은 피고라 부르지 않고"그 편"이라고 불렀고 박열은 재판장을 "자네"라고 호칭했다고 합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후 박열은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몸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나"라고 했으며 가네코 후미코는 사면장을 찢어버리며 자신의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떨어진 이후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가네코의 시신은 서둘러 매장되기도 합니다.

이제훈이 연기한 박열과 실제 박열
영화 박열 속 가네코 후미코와 실제 가네코 후미코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가 빠져들었던 아나키즘은 권력 또는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n archos’라는어원으로부터 유래된 아나키즘은 모든 제도화된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을 뜻합니다.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고 그에 대한 모든 억압적인 힘을 부정하는 사회철학이자 정치이념인데 1789년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활약했던 근대 아나키즘의 선두주자 영국의 W. 고드윈(William Godwin)에 의해 성립되기 시작했으며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며 사상을 형성시킨 프랑스의 P. J.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이 세계의 아나키즘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러시아의 M.A. 바쿠닌이 민족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결부시켜 성격을 바꾼 아나키즘은 19세기 유럽의 혁명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남유럽, 북미 등 산업화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Kropotkin)의 이론에 의해 더욱 체계화된 아나키즘은 한, 중, 일 등 동아시아의 혁명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나키즘은 세계의 흐름과 맞닿아 있지만 일제 치하의 한국 아나키즘은 식민지 지대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일본과 중국에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 시기 일본과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던 박열, 신채호, 김원봉, 유림, 이회영, 백정기, 유자명 등이 대표적인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입니다. 이들은 권력의 속성인 억압과 강제를 거부하고 평등을 이념으로 독립된 주체로서 자유를 신봉하는 휴머니스트이기도했는데 아나키즘의 사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시, 소설의 창작 등 문학 활동을 비롯해 음악과 그림으로 이어지는 예술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젊은이들의 저항 정신과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민중의 평등, 권력과 폭력의 부당성에 대해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을 토대로 투쟁하는 사상가를 아나키스트라고 통칭하기도 합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은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라는 인물을 재발견해냈듯이 우리 사회에 아나키즘으로 무장한 채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박열과 가네다를 재조명할 수 있을지 기대되기도 합니다. 영화 박열은 그의 일대기를 영화 전반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불령사를 통한 항일 투쟁을 하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과 사형선고를 받는 재판 과정 등을 세밀하게 보여줄 것이며 독립투사의 기개뿐 아니라 아나키스트로서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했던 연인 가네코와 박열의 시대를 앞서갔던 진보적인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조선남아 박열을 사랑하다

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가네코 후미코 金子 文子 かねこ ふみこ Kaneko Fumiko:1903년 1월 25일~1926년 7월 23일), 영화 박열에서 아나키스트로 묘사되는 박열의 일본인 부인이기도 합니다. 영화 박열에서 박열의 부인이자 동지였던 일본인 여성 아나키스트로서의 가네코 후미코가 더욱 뇌리에 깊이 남아 버리는데 일단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만나 곧바로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녀의 나이 만 19세 때로 박열 역시 그녀보다 겨우 한 살 많았던지라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참 당돌하고 거침없던 나이에 둘은 현재로서도 쉽지 않은 동거 생활을 시작하는데 그 제의는 박열이 아닌 가네코 후미코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박열이 청년 조선에 쓴 개새끼란 시를 보고 가네코 후미코는 직감적으로 박열이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고 재판 과정에서 말합니다.

개새끼"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그 일이 그 사람 안에 있었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숙명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고 법정에 선 것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다

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무적자無籍者로 버려진 어린 시절의 아픔이 더욱 견고한 그녀를 만들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출생으로 불행하게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부모 양쪽 모두에게 양육을 거부당한 채 무적자라는 이유로 인해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가네다 후미코는 친척 집 등지에서 맡겨져 자라던 중 10살 무렵인 1912년 당시 조선의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 위치한 고모의 집에서 들어갔지만 할머니의 학대를 받는 등약 7년간 조선에 거주하면서 부강 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나이 17살 되던 해인 1919년 3.1 운동을 직접 목격한 가네코 후미코는 당신 조선 민중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가네코 후미코의 어머니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불안정한 생활이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친모가 자신을 술집에 팔아넘기려 하자 가출하여 도쿄의 친척 집에서 신문배달, 어묵집 점원으로 일하며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하는데 이 무렵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과의 교류하면서 이들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으며 1921년 도쿄에 유학한 한국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법정에서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박열과 함께했던 그녀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과의 동지적 동거

적극적인 대시로 박열과의 동지적 동거에 들어간 그녀는 흑도회와 흑우회에 함께 가입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뜻을 같이 하면서 1923년에는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기에 이르릅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둘의 만남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어떠한 식으로던 일제에게 물리적인 테러를 가했을 수도 있겠지만 시대가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사이를 시기했던 것일까요? 그 해 가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고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민심에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또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퍼뜨린다는 등 유언비어를 날조, 조선인 학살을 유도하며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민심이반을 조선인 학살로 돌리고 그와 동시에 희생자를 물색하는데 그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 보호 검속 명목으로 구금되어 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입니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일본 천황 암살 기도라는 죄목으로 1926년 사형 판결을 박게 되고 박열은 옥중에서 결혼 서류를 작성하여 가네코 후미코를 서류 상 박 씨 집안 호적에 넣습니다.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내에서 죽으면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 박열이 생각해낸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지나 둘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가네코 후미코는 이감되어 박열과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감 후 감옥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고 지금까지 그녀의 죽음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은 채 박열의 형에 의해 그녀의 유골은 고양 문경에 안장됩니다. 겨우 24살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의 남아 박열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하려 한 일본의 여성 아나키스트의 삶은 옥중수기 나는 나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 로 그녀의 사망 86주기에 맞춰 발간되었으며 또 다른 옥중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역시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단순히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박열의 아내가 아닌, 식민지 조선 남아 박열을 사랑하고 조선을 사랑했으며 일본 제국에 맞선 깨어있는 신여성이자 사상가, 사회운동가였으며 한인 사상 단체의 효시로 평가되는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를 발간, 아나키스트 단체 흑우회를 결성, 투쟁하는 등 비범한 사상과 행동력을 가진 실천하는 아나키스트이기도 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불우한 삶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극복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녀 가네코 후미코를 우리에게 분명 기억되어야 할 일본인이기도 합니다.

박열.Anarchist from Colony 2017

절대 잊어선 안되는 관동 대지진關東大地震과 일본의 조선인 대학살

관동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시즈오카 靜罔, 야마나시 山梨 지방에서 일어난 매그니튜드 7.9, 최대 진도 7.0의 대지진으로 관동 대지진은 대규모의 화재와 해일, 토네이도로 이어지며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를 파괴한 전대미문의 자연적 재앙이었습니다. 일본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관동대지진으로 사망자 9만 9,331명, 행방불명 4만 3,476명, 가옥 전파全破 12만 8,266동, 반파半破 12만 6,233동, 소실 44만 7,128동, 유실 868동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집계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이 총 40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관동대지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음날 출범한 야마모토 곤노 효에 山本權兵衛 내각이 자국민의 흉흉해진 민심과 불만을 잠재우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조선인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등 한국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린 후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관동대지진은 단 하루 만에 일본인들에게 터전을 앗아간 국가적 재앙이었지만 더 큰 재앙은 이후에 벌어진다

관동대학살, 일본 정부와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사냥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이 기획, 방조한 조선인 사냥은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이 전국적으로 3,689개가 조직되면서 일본 관헌들과 연계하여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거나 구타, 학살하기에 이릅니다. 이 당시 일본인 자경단 등에 의해 살해당한 조선인의 숫자는 보수적인 통계에 따라도 2,500명이 넘으며 문헌에 따른 피해자는 6,000명에서 1만 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당시 총피해액이 65억 엔이며 이후 복구를 위해 갖은 노력을 펼치지만 무고한 조선인 6.000명에서 1만 명의 학살은 역사상 가장 잔혹한 학살을 기획하고 동조한 책임을 오점으로 남긴 채 지금도 묵묵부답으로 죄를 빌지 않고 있습니다.

관동 대지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식의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불만 세력이 조선인들을 학살하게 방조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좌익 세력을 뿌리뽑기 위한 기회로 삼아 노동운동가 히라사자와 게이시치 平澤計七, 사회주의 지도자 오스기 사카에 大杉榮 부부 등이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에 의해 살해되는 등 일본의 진보적 인사 수십 명을 검거,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역시 관동 대지진의 후폭풍을 최소화하려고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아나키스트들인 이들 부부는 도리어 일본인들과 일본의 극우 권력에 맞서 자신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니 비록 폭탄을 던지고 수십 명의 일본 관료들을 살해하지는 못했어도 이들 부부의 아나키스트 정신과 사상은 도리어 지금도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깊은 감명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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